건축가 김종대를 검색해보면 관련 기사들이 정말 많이 떠요. (웃음) 어떤 분이신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Social Architect 김종대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건축’이라는 도구로 풀어나가는 것이 제 역할이죠. 현재 디자인 연구소 이선(利善)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멘토님께서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하셨나요?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 취직을 했어요. 그 당시에 저도 지금의 건축학과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건설회사를 갈지 설계사무소를 갈지 고민을 했죠. (웃음) 건축설계를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결국 설계사무소에 취직을 했어요. 그 곳에서 9년 정도 일을 했죠. 제가 차석 디자이너로 국립 중앙 박물관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 그 곳에서의 마지막 일이었어요. 그 후 독립해서 제 사무소를 차렸죠.
멘토님도 건설회사와 설계사무소 사이에서 고민을 하셨군요. (웃음) 사회적 건축가가 된 계기가 있나요?
2001년에 파키스탄 선교 봉사를 간 적이 있어요. 저는 선교학교 설계를 부탁 받아 하릴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었는데 같이 온 의대생을 보니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영웅이 되어 있는 거에요. (웃음)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축가란 직업이 왜 사회적으로 인정 받기 힘든지, 과연 나는 건축가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 때부터 지역과 사회 봉사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사회적 건축가로서의 첫 데뷔가 부래미마을이라고 알고 있어요.
네, 맞아요.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관심이 있을 무렵 운 좋게도 농촌 살리기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부래미마을이었죠. 마을의 강당을 어떻게 지을지, 식당은 몇 명을 수용하도록 만들지, 숙소 운영은 어떻게 할지 등 사소한 것부터 전체적인 것까지 훈수를 들었어요.
부래미마을 주택을 1억 2천으로 지었다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실 30평의 집을 1억 2천으로 짓는다는 게 쉽지 않죠. 그런데 농촌의 현실을 들여다 보면 공사비에 여유를 갖고 시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공사비도 힘든데 설계비는 어떻게 지불하겠어요. 그러다 보니 농촌의 집들이 건축가의 지원 없이 대충 지어지는 거에요.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고생도 많았지만 이 집을 완성하고 농촌건축대전의 초대작가로 선정되는 좋은 결과를 얻었지요. 무엇보다도 농촌마을을 이해하고 부래미마을 주민들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죠.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어요 (웃움)
하지만 그 후로도 멘토님께서 양평에 1억 원으로 집을 지은 사례가 또 있어요.
어느 날 젊은 집주인이 부래미마을 주택 비용을 보았다면서 저에게 연락이 왔어요. 1억 조금 넘는 돈이 전부인데 집을 설계해 달라고 했죠. 처음에는 되게 난처했어요. 또 설계비를 못 받고 집을 지어줘야 되는 거였으니까요. (웃음) 그런데 젊은 집주인이 저를 세 번이나 찾아와 부탁하셨어요. 그리고 그 때마다 건축주 부인께서 손수 만든 브라우니를 싸가지고 오시는 거에요. 그 브라우니는 제가 지금까지 먹어 본 쿠키 중에 가장 맛있었어요. (웃음) 결국 그 정성에 감동 받아서 이익과 상관 없이 집을 설계했죠.
△ 양평 1억으로 지은 집
삼고초려네요. (웃음) 그 집이 방송에도 나가고 참 유명해졌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솔깃했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줬어요.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 후 모 잡지의 인터뷰에서 감동적인 사연 때문에 시작했다고 했더니 그때부터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사연들을 가지고 저에게 연락을 했죠. 그분들로서는 다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다 들어드릴 수 없어서 죄송했어요.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웃음) 하지만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도와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에 돈은 안되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주택설계를 다시 시작했어요. 건축가로서 제가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못골시장 이야기 간판
전통시장을 되살리는 일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2008년도에 문화부에서 주최한 문전성시 사업에 참여했어요. 5년간 23개의 재래시장을 활성화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매우 성공적이었죠. 많은 재래시장들 중 수원 못골 시장의 이야기 간판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와 꿈을 담은 간판을 만들어 주는 사업이었는데, 상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간판으로 인해 물건만 사고 팔던 공간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 바뀌었죠. 어떤 떡집 간판은 비행기였어요. 주인 아주머니가 젊었을 때 파일럿이 꿈이었대요. 간판을 제작할 때 아주머니가 직접 그린 비행기를 따와서 디자인을 했어요. 그 작은 간판 하나에 감동과 스토리가 들어간 거죠.
농촌도 살리고 전통시장도 살리고 가치 있는 일들을 많이 하셨네요. 멘토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이런 사회적 활동들을 통해 어느새 저는 문화기획자가 되어 있더라고요. 모 대학교수님께서는 저를 창조적인 일자리를 개척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시기도 해요. 사실 꼭 그렇지도 않은데. (웃음)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그 공간이 왜 필요한지 근본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된 건 사실이에요. 그런 의미에선 건축가이자 문화기획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웃음)
△ 멘토님의 또 다른 작품, 헤이리 백농 스튜디오
멘토님께서는 더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 궁금해요.
제가 홍익 대학교 겸임 교수를 할 때 명지대에서 여가경영학 대학원을 다닌 적이 있어요. 다들 제 프로필을 보고 여기 왜 왔냐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학위를 위해서 다닌 건 아니고 사고력을 넓히기 위해서 노력한 거죠.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좋았어요. 자식 같은 학생들과 함께 수업 듣는 것도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인연으로 문전성시 사업에도 관여할 수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 저는 과제를 많이 내주는 선생이었는데 대학원을 다니면서 숙제 하기가 너무 싫은 거에요.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숙제를 안 내주게 되었어요. (웃음) 학생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니 학생들도 좋아하고 더 따르게 되더라고요.
학생이 되어 수업을 들으시다니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웃음) 건축만이 가지는 특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건축은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다 맞춤으로 하기 때문에 매번 다른 아이디어로 다른 작품을 만들죠. 핸드폰 같은 건 하나의 디자인을 갖고 수 만대를 팔 수 있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건축은 예술과 산업의 경계지점에 있다고 봐요. 주문을 받아서 만들어 내는 과정은 산업적이지만 단 하나의 작품이 나오니까 그 내용은 예술적이죠. 어떻게 보면 생산성도 매우 낮고 비효율적이라서 힘들 수 있어요. 근데 바로 그런 점이 건축의 매력인 것이죠. (웃음)
산업적이면서 예술적이다. 전혀 다른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니 흥미로운데요. (웃음) 건축 일은 밤샘 작업이 많다고 들었는데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대부분의 건축 사무소들이 밤샘 작업이 많죠. 근데 저희 사무소는 밤샘 작업을 거의 안 해요. (웃음) 안 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어요. 일단, 제가 평소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제가 결정권을 갖게 되었을 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불편, 부당함을 해소하는 것만 해도 사회가 크게 개선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도 젊었을 때 야근하기 싫었거든요. 야근이 형식화 되어서 쓸데없이 야근하는 경우도 예전엔 종종 있었어요. 또 다른 이유는 야근할 시간에 차라리 다른 경험을 하는 게 회사차원에서도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계 팀원들이 창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제가 경험해 보니 다양한 경험이 없으면 그러기 힘들죠. 그래서 밤샘 작업을 안 하려고 해요.
밤샘 작업을 안 한다니 의왼데요? 왜 사무소 이름이 이선(利善)인지 알 것 같아요.
하하. 이선(利善)이 ‘이로울 이’에 ‘선할 선’자인데 사람들에게 이롭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로 지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집사람 이름의 가운데 자를 빼면 이선이기도 하죠. 평소에 잘 못하니까 사무실 이름으로 점수 좀 따려고 했죠 (웃음)
그런 의미가 숨겨져 있었군요. (웃음) 멘토님이 생각하는 훌륭한 건축물은 어떤 건지 궁금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 건축물 안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건축물을 보고 좋아하고, 더 나아가 그 동네가 그 건축물로 인해 아름다워진다면 그건 더 없이 훌륭한 건축물이죠.
건축가가 진출할 수 있는 방향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멘토님을 보니까 활동 분야가 매우 넓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멘토님처럼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을까요?
학교를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어요. 그 다양한 경험들은 사회에 나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자산이 되죠. 건축만 잘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어요 요즘은 T자형 인재를 원한다고 하잖아요? 사회의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하면 자기 전문분야에서도 인정받기 힘들어요. 인정이고 성공이고를 떠나서 매력도 없고요. (웃음) 건축이라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인간본연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분야에 비해 경쟁력도 있고 할 수 있는 일도 매우 많아요. 건축물을 넘어서 마을, 시장, 공동체 등 더 큰 범주의 활동들을 할 수 있죠.
또, 건축이란 것을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생각 해볼 필요가 있어요. 사실 산업 사회에 대표적인 것이 건축이었는데 정보 사회로 바뀌면서 입지가 좁아진 측면이 있죠. 건축이 어떻게 하면 정보 서비스 산업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 그 방향을 모색하면 새로운 일자리가 창조될 것 같아요. 이미 외국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건축도 변화된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야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건축가로서 갖춰야 할 능력은 뭐가 있을까요? 디자인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맞아요. 설계를 하려고 하면 의뢰인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되기 때문에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네트워킹에도 능해야 합니다. 의뢰인의 행동과 성격이 어떤지 파악해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을 만들 수가 있어요. 즉, 건축가가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야 하죠. 또, 건축가는 설계에 필요한 구조, 전기기계설비등과 같은 연관 분야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할 경우가 있어서 다양한 학습이 필요해요. 그래서 좀 힘들기도 하죠. (웃음)
매번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죠?
아이디어는 철저한 리서치로부터 나와요.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마을에 집을 짓기로 했으면 마을의 전형, 사람들의 구성, 불편한 점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조사해야 되요. 그리고 자료를 다 수집하고 개선 방안을 생각하는 거죠. 물론 자료는 객관적이어야 해요. 대부분 학생들의 실수가 본인의 생각이 일반적이고 객관적일 거라 가정하고 건축 설계를 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거든요.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을 통해서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 한 마디 해주세요!
미친 짓을 많이 하세요. (웃음) 학교 다닐 때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야 되요. 이건 건축가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다 마찬가지에요. 학교 다닐 때 가장 매력 없는 친구는 학교만 열심히 다니는 친구에요.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어느새 자기만의 생각이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언제 성공할 것인가 보다는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세요.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이 제 나이쯤 되어 참 잘 살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단언컨대 가장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Side Story 리포터 후기
콘텐츠 기획팀 리포터 이재윤
미디어콘텐츠디렉터
담당부서:인터뷰
취재:이재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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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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