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로 말하면 교육계, 제조업, 건설업, 출판계, 방송계, 문화예술계, 관광개발업 등 10군데 넘는 곳에서 기획 일을 해왔습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니 직장 경력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써보라는 권유도 받은 정도입니다. 간단히 소개한다면 제가 임의로 만든 직종이기는 하지만 ‘문화기획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문화예술 분야의 큰 프로젝트만 찾아보면, 예술의전당 건립과 운영,파주출판도시 조성을 들 수 있고 이밖에 몇몇 지자체의 문화사업과 서울예술대학에서 예술교육과 경영 일을 맡아 왔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셨고 졸업 후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교직원을 그만두셨는데요! 전혀 다른 업무인 문화기획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문화예술계에 일을 하게 된 것은 납치 아니 유괴를 당해 시작되었다고 할까요? 80년대 초반 언론계 출신 선배가 ‘예술의전당 건립본부’에 가게 되었는데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사양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감사했지요 하하. 그러나 인문계와 예술계는 이웃이라는 논리로 나를 볼모로 잡아 데려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 경험이 계속 꼬리를 물게 되어 어느덧 나름 문화기획가라는 꼬리를 달게 되었습니다.
우연보다는 운명 같은 납치에서 시작됐는데 30년 동안 문화기획 일을 쭉 해오셨습니다. 멘토님만의 차별화 된 강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문화라는 단어는 흔히 쓰는 단어이지만, 막상 문화란 무엇이다라고 표현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 구석구석에 모두 문화가 스며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문화기획가가 되는 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직업의 하나로 선택하기 보다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을 넓히고 높여야 한다는 시대의식 혹은 사명감을 가졌다면 누구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질이 높아졌다는 것 아닌가요? 문화적 질의 향상을 통해 문화의식이 높아지면 가장 중요한 삶의 질과 공동체 의식의 균형감까지 이루게 됩니다. 소위 우리 사회에 절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아가 시티젠 오블리주 기회를 넓히는 일까지 문화기획가의 역할이자 몫이라는 생각입니다.
멘토님께서는 회사를 다니다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그만뒀다고 하셨는데요. 일할 수 없는 공백기간 동안의 초조함, 경제적 문제 등 현실적으로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저는 관례를 따지지 않습니다. 80년대에 산학협력을 하고 예술 대중화를 위한 일을 했다는 게 지금으로선 상상초월입니다. 도전과 모험을 중요시 하다 보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소신 있게 밀어붙였지요. 그러다 또 싫증이 나면 사표를 많이 냈습니다. 싫증이라는 건 내가 회사에 더 기여할 가치가 없고 더 있어봤자 내 힘으로 개선이 안 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직장은 생업을 위한 보험이 아니라 일의 가치를 찾는 모험을 하는 곳’ 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이러한 소신 덕분에 몇 차례 실직자가 되어 힘들기도 했지만,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저런 인연과 기회가 주어져 새로운 일(직종)을 계속하게 되었지요.
문화기획가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한 프로젝트를 위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기획하는 일입니다. 예술의 전당을 예로 들면 한 공간에 음악, 공연, 미술 등의 모든 예술 장르를 수용하다 보니 많은 의견들이 나옵니다. 사용자와 이용자의 여러 목소리를 수용하여 기획하는 일이 주 업무였습니다. '대중예술의 고급화, 고급예술의 대중화’ 를 모토로 국민을 위한 예술의 전당을 짓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일반 대중이 아닌 고급 매니아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대중화를 위해 표가 없이도 음악당 로비를 개방하여 누구나 음악과 영상을 감상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야외 스피커를 통한 음악 감상도 가능했지요. 이 모든 것들은 예술의 전당 공간들이 ‘오픈 뮤지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꼭 표를 사서 입장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걸으면서도 볼 수 있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란 생각이 바탕입니다. 밖에서도 누구나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시며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시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와 함께 말씀해주세요.
개인적으로 뿌듯한 일은 서울예술대학과의 산학 협력을 통해 신입사원들의 예술전문가과정을 만든 일입니다. 80년대엔 산학협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무작정 서울예대를 찾아가 부탁을 했습니다. 이 대학은 예술교육을 현장 체험형으로 훈련시키는 특화된 대학이지요. 그 결과 교수와 전문가가 대학원 과정으로 480시간 동안 신입사원들에게 전 문화예술에 대한 개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해외 인턴쉽을 통해 세계각국의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보다 높은 예술적 안목을 기르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후학을 양성하고 국민의 문화향유 기반을 위한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것이 기쁩니다.
△ 30년 전 기획실장으로서 건립과 운영을 한 예술의 전당에서 추억에 젖은 이규동 멘토의 모습
문화예술 분야의 전망을 어떻게 보시나요?
보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수요가 많지 않지만 다른 직종보다 장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전국 지자체마다 문화재단, 예술센터, 문화시설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상대적으로 전문가가 부족한 상태이므로 ‘맑다’고 봅니다. 문화재단이나 문화예술시설의 기획자는 공간이든 프로그램이든 주인, 주체, 상위관리자의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 향유자의 입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일에 있어서 보수에 집착하지 않길 바랍니다. 덜 받더라도 일의 가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많이 받으면 돼지가 됩니다. 자기 방어만 앞서기 때문이지요. 미래지향인지 현재가 중요한지 생각하세요. 일의 의미가 있다면 돈에 집착하지 마세요.
공공기관의 지역문화정책 이력과 ‘PRO BONO(공익을 위하여)’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아직도 ‘일이 고프다’이지만 급여를 주는 직업을 찾는 것은 제 경력이나 나이에 무리한 욕심입니다. 모자라는 것도 있지만 더 채운다는 마음가짐, 나눔이란 차원에서 보람과 의미라는 보상으로 공익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항일영상역사재단이라는 곳에서 사무처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콘텐츠 제작, 청소년 영상교육 등 공익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문화기획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인성적 능력과 직무적 능력은 무엇인가요?
문화,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의 본성, 인간의 궁극의 가치와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심, 탐구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해야 하는가?’를 탐색합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가’를 알게 되지요. 마지막으로 이 일의 최종 소비자, 을의 처지가 되어 ‘내가 그 입장이라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할 것인가?’를 대입한다면 자연스럽게 일이 풀립니다. 일에 대한 자세, 사고방식, 탐구심이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만 갖추면 특별한 스펙은 필요치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기죽지 않는 열정과 일시 좌절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복원력이 중요해요.
스펙보다는 열정과 탐구하는 자세가 멘토님이 지금의 길을 걷게 했군요. 멘토님을 보면 나이에 무색하게 끊임없이 도전하시고 열정적으로 사시는 듯합니다.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이제 누구나 수명이 길어지면서 50년 넘게 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요. 그러나 직장의 수명은 50대 전후에 끝나기에 사회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러므로 50년 직업을 가지려면 평생 공부하고 평생 개척하고 평생 변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주위에 하는 얘기가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부’를 해야 한다. 하나는 공부이고 두 번째는 아부이다”이지요. 여기에서 아부는 결코 아첨이 아니고 진정성을 바치라는 것이고 공부를 해야 진정성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최고의 아부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항상 오픈 마인드로 열려 있어야 시대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읽게 되고 그 변화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를 계속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깨달으려 했기에 인정 받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남보다 많은 급여를 받지는 않았지만 수입의 20-30%는 R&D 투자로 생각하여 자기 계발을 위한 비용으로 써왔습니다. 주로 술값이었겠지만(웃음) 책값 등 문화적 소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얘기이지만 ‘넘어질 때마다 무엇이든 하나는 줍고 일어서라’는 말을 중히 여깁니다. 어떤 일에서 좌절과 실패를 당하더라도 그 일에서 무언가 하나를 배우고 그 일과 관련된 사람과의 인연을 지우지 않고 소중히 유지해 온 것도 훗날 큰 도움이 되었지요.
제 경우 인생의 전반전은 이미 끝났고 후반전도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만 다시 연장전이라 생각하여 놀더라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사냥감을 찾는 열의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들이 나를 잊지 않고 기회가 되면 일을 주게 되니까요. 사회에서 주변에서 잊혀지는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존재감의 유지’가 중요합니다.
문화기획가가 되기 위해선 지금 당장 OOO하라!
앞서가세요. 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얼굴은 과거를 보고 다른 얼굴은 미래를 보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를 보고 비판하며 미래를 보면 현재가 보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보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세요. 그러면 미래는 어떻게 알 수 있나? 수없이 정보를 찾아야 합니다.
책에서 힌트를 얻으세요. 작가의 관점을 빌리고, 생각을 응용하고 팁을 얻으세요. 미래는 어떻게 흘러가고 과거가 어떠했는지 동시에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남이 안보는 일을 기획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어렵고 전문적인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색다르게 생각하는 창의성은 비판력 바탕 아래 생겨 납니다. 문화예술기획 또한 항상 비판을 해야 새로운 대안과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이규동 멘토님이 추천해주신 책들
문화기획가가 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이나 강의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 책 저 책 모두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다 권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 아무리 좋아도 반드시 종이책을 읽어야 합니다. 인터넷으로 얻은 지식은 머리에 남지 않고 금새 날아가 버리지요. 매달 한 두 번은 꼭 서점 특히 중고서점에 들러 책을 골라보는 습관을 갖기 권합니다. 설사 책을 못 사게 되더라도 책을 고르고자 제목과 목차를 보는 순간도 이미 책을 읽은 것 같은 효과를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고르는 능력이 생긴다면 이미 지식인입니다. 책을 읽되 읽지만 말고 책 내용 속에서 무언가 힌트와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다른 것으로 응용, 변형시키는 유연성 있는 이용자, 사냥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문화예술기획에 관심이 있다면 루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이란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창의력을 다룬 책인데 근래 보기 힘든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을 일깨워 주지요. 그 외에 로버트 그린의 책도 권합니다. ‘유혹의 기술’, ‘권력의 법칙’ 등 저자의 책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앞으로 이규동 멘토님의 꿈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누구에겐가 혹은 무엇인가에 노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혹은 무엇의 노예가 될 것인가의 선택권은 바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아닐까요? 진정한 자유는 누구, 무엇의 노예가 될지를 선택하는 것에 있지요. 그래서 인간사회에서는 누구나 ‘갑-을’ 관계가 필연적입니다. ‘갑’이라 하더라도 누구도 최상위의 ‘갑’은 아닙니다. 재벌 회장도 심지어 대통령도 순간적으로나 궁극적으로 ‘갑’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을’입니다. 그래서 내 꿈은 ‘슈퍼 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을이 되는 이유는 자기를 위한 방어 활동만 하기 때문입니다. 을이지만 나만을 위한 방어가 아닌 회사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생각하고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슈퍼을의 의미입니다. 방어만 하지 마세요. 일할 때는 공격적으로 일하고 굶더라도 양보하지 않는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슈퍼 을’이 내 꿈이라기 보다 모든 젊은 이의 꿈이자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문화기획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와 역량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문화예술기획이라는 분야는 쉽게 정의한다면, 창조적 예술가와 문화예술 수요자간의 흥행사이자 큐레이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획의 중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착상이 한쪽에서만 시작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기획이던 핵심은 “누가 누구를 위하여 하는가?“에서 시작되고 준비되고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이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문화큐레이터’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면서도 현대에서는 사회적 그물이 촘촘하다고 할까요. 먹이사슬, 가치사슬이 너무 빡빡해지고 경직되어서 오히려 동물 사회보다도 더 쫓기고 핍박한 삶이 되지 않았습니까? 사회 속에서 사람들 간의 적응, 접합하는 관계에서 예술적 감성을 찾게 될 때에 사람으로서 품격과 존재감을 되찾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문화예술 체험이 생산성을 키우게 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문화예술기획자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흔히 문화예술기획자라 하면 공연기획자, 큐레이터를 연상하며 프로 혹은 스페셜리스트로 보지만 저는 오히려 ‘제네랄리스트’라고 보고 싶습니다. 관련 분야에 전문성이 있어야겠지만 그보다는 동시에 인간의 삶의 동력과 행복추구에 관련해 고른 지식과 깊은 통찰을 가지고 통합적인 안목과 추진력을 가진 제네랄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잡식이냐 편식이냐 한다면 잡식성 직업이라 볼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선입관, 자기 감정 때문에 자신 주변의 일이나 사람을 못보고 지나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오픈 마인드로 열려 있어야 사회의 변화를 읽게 되고 그 변화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Side Story 리포터 후기
콘텐츠 기획팀 리포터 안하현
미디어콘텐츠디렉터
담당부서:인터뷰
취재:안하현
INTERVIEW
안하현
dangmenso5@mailinfo.saramin.co.kr
EDITOR
안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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