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는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생각할 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STRORY 01 About 허영철
성명 : 허영철
직무 : 사회복지사
안녕하세요.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11년 된 북한이주민지원센터라는 NGO의 소장, 그리고 통일부와 같이 운영하고 있는 하나센터의 센터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곳은 공감 게스트하우스인데 탈북자들도 같이 참여하는 사회적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실무담당자로서 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크게는 그렇게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NGO, 하나센터, 공감 게스트하우스 세 가지 업무를 하고 계신데요. 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업무는 무엇인가요?
법인 차원에서 추진하는 북한이주민지원센터입니다.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취업 지원, 의료 지원, 교육 지원으로 구분 짓지 않고 토탈 케어를 하는 것입니다. 대구와 주변 지역에 살고 있는 탈북자 숫자가 적기 때문에 모든 스텝들이 업무와 관계없이 상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지금도 상담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세 기관이 북한이주민의 사회 정착을 위해 운영되는 만큼 중첩되는 업무들이 많겠네요?
네, 하나의 단체라고 봐도 되죠. 대구 하나센터는 민간 기관과 통일부가 함께 운영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센터는 서울과 함께 처음 만들어진 시범기관이에요. 지역사회에서 탈북자가 적응하기까지 도와줄 수 있는 지원센터를 만들면 좋겠다고 통일부가 제안해서 설립되었습니다.
북한 이주민 지원 사업은 큰 틀에서 사회복지의 일부잖아요, 특별히 사회복지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세요?
원래 소속되어 있던 기관이 자원봉사능력 개발원이라는 자원봉사 관련 법인이면서 대구에 자원봉사센터도 운영하고 노숙자 사업을 하던 기관이었어요. 12년 전이었던 당시에, 대구 지역 노숙인이 자활하도록 도와주는 쪽방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일반 장애인, 노인 일반 복지는 복지관에서도 틀이 잡혀 있었는데 노숙인은 NGO 같은 기관의 역할이 필요했거든요. 정부 지원도 없는 사각지대를 사회복지 NGO가 파고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 북한 이주민이 130명가량 거주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도와주고 있는 거예요. 이 또한 사회복지 NGO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저희 팀이 시작하게 되면서 제가 실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연을 맺게 되신 거예요?
그렇죠. 실무자로 처음 시작했고, 3년 전에 복지관을 백화점 식으로 운영하면 안 된다는 내부 토론을 거쳐서 노숙인과 북한 이주민 부분을 분리했어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이라는 별도의 법인을 만든 거죠.
아, 그러면 공감이라는 법인에서는 북한 이주민 관련된 사업만 하시는 거군요.
북한 이주민만을 위한 법인 이름을 공감이라고 지었어요.
노숙인 지원 사업에도 애정이 크셨을 텐데 북한 이주민 지원 사업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연히 2003년 중반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연변에 한 달간 있었어요. 탈북자가 뭔지도 모르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식량을 구하러 연변으로 넘어오는 모습을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제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이 북한이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잘 살고, 굶어 죽고 가 결정되더라고요. 바로 옆 나라인데, 아무리 북한이 미워도 우리 아버지 형제들은 이렇게 살다가 죽었구나, 지금도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식량을 구하러 주로 여성들이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북한은 굉장히 봉건적 사회라 몇 달이 걸려도 식량을 구하는 것은 여자가 하더군요. 그러다가 중국에서 인신매매 당해서 팔려가는 경우도 생기고요. 너무 가슴이 아팠죠. 돌아가서 열심히 해야겠다며 11년 째 북한 이주민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경험의 영향이 컸죠.
△ 북한 이주민의 사회 생활의 발판이자 대구 문화 교류의 장, 공감 게스트하우스
사회복지가 원래 전공이 아니셨다고 들었는데요. 따로 공부를 하신 건가요?.
원래 경제학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장사했습니다.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어느 날 후배와 밥을 먹다가 ‘사회복지 입문서’라는 책을 주고 갔어요. 아마 저한테는 이쪽이 잘 맞을 거라면서 말이죠. 그때 저는 '사회복지가 뭐야?' 하고 물을 정도로 문외한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 책을 보고 대학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30이란 늦은 나이에 말이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걱정이 컸을 텐데요.
엄청 들었죠. 인생에 제일 큰 선택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결정을 내리게 되셨나요?
서울 생활이 자극을 줬는데요. 서울이란 도시 속에서 경쟁하며 사는 게 힘들었어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되는지 뛰어다녀야 되는지도 몰랐죠. 한 번뿐인 인생이니 무언가 하나는 하고 살아야겠다, 후회하지 않고 살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만약 당시에 결혼을 하셨더라면 사회복지를 선택했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못 했을 것 같아요. 혼자(미혼)였고 집안이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큰 결심이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공부 과정은 재미있었어요. 경쟁도 없었고요.
그런데 처우가 좋게 제도화된 사회복지 분야로는 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NGO에서 시작했는데요. 처음부터 사회복지만 시작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고용주가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공부 자체도 도전이셨을 텐데 사회복지의 여러 길 중에 쪽방상담소로 시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졸업할 때 유네스코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저를 추천해주신 교수님은 제가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었는데요. 화장실이 하나 있는 쪽방촌이나 달동네같이 아무도 안 가는 동네를 다니시면서 보고서를 발표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시는 분이셨고요.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는 좋은 곳에서, 인정받는 기관에서 일하기를 권하셨었는데요. 저는 교수님처럼 살겠다 해서 쪽방상담소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지역 하나센터에 대한 탈북자의 반응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죠. 처음에는 왜 자꾸 우리한테 교육하려 하냐며 거부감을 가진 분들도 있었어요. 이제 5년째가 되면서 안정되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센터에서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 정착도 잘 한다고 조사되었습니다.
정착을 잘 한다는 것은 취업도 잘되고 지역주민과 교류도 생긴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죠. 제일 핵심은 취업이라고 봅니다. 건강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중요한데 사람마다 다 다를 겁니다.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전 세계 이주자나 난민의 역사를 보거나, 한국의 탈북자를 봐도 역시 핵심은 안정적인 직장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 공감 게스트하우스 1층에 마련된 북카페 겸 문화공간은 북한 이주민이 한국 사회에서의 첫번째 사회생활 을 시작하는 곳이다.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금이 뒷받침돼야 하고, 취업은 필수라는 것으로 풀이되는데요. 그럼 대구지역에 거주하는 북한 이주민에게 어떤 방식으로 취업을 지원하고 계시나요?
6년째 대구노동청과 탈북자 취업 사업을 해왔고 국무총리상 을 수상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령 제조업에서 단순 노무직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업체로 취업을 지원하는 것이 6년 노하우입니다.
직업훈련을 통한 취업만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전에 직업자격증 쪽은 분화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보거든요. 이미 전문대학은 대학의 기능보다는 고급 기술의 기능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전문대학으로 진학하고, 전문적인 직종에서 근무하기를 권합니다.
그러면, 소장님께 상담을 받은 북한 이주민들은 대학으로 진학하시는 경우가 많은가요?
나이에 따라, 성향에 따라 다릅니다. 나이가 좀 있으시거나 젊지만 돈을 빨리 벌고 싶은 욕구가 강한 분들은 우리 기관의 직업 훈련을 받고 바로 취업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룰을 정하게 되면 개개인에 맞게 서비스 제공이 안 되죠. 각 개개인에 맞게 사례별로 접근하는 게 취업률을 훨씬 더 올릴 수 있다고 보거든요.
간호사, 치기 공사, 물리치료사처럼 전문 대학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요. 사회복지도 전문 대학으로 많이 진출하고 있고, 4년제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더 쉽게 공부하고 자격증 따서, 전문 직종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그런 쪽에 재능을 보이는 분들은 저희가 전문대학으로의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죠.
초기 정착금도 빠듯하다고 들었는데요. 등록금 충당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시나요?
등록금은 정부가 납부합니다. 대신 나이와 성적에 제한이 있습니다. 진학하더라도 성적이 떨어지면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하죠. 일반적으로 북한 이주민의 대학 진학률이 5%라고 하는데, 대구와 경상권 지역은 800명 중에 80명인 10%로 높은 편입니다. 전문대학 중심으로 진학을 지원해서 이 중에 70%가 전문대학입니다.
대구가 서울 다음으로 대학이 많은 점이 대학 진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나요?
네, 그렇죠. 학과도 전문대학도 다양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적성에 맞는 과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죠. 대구 주변 지역에서 대구로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대구지역 대학 기숙사로 오시면 저희 지원을 받으실 수도 있고요.
입학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저희는 졸업률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서울 지역 대학은 통일부 통계를 봐도 중퇴율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대학 생활을 무사히 마치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취업을 하더라도 남북한이 분단된 지 오래됐기 때문에 직장문화가 다른데요. 북한은 국가가 배정한 곳에 가서 일하니까 공무원 개념에 가깝습니다. 경쟁이 중심인 자본주의 사회, 남한과는 너무 다르단 말이에요. 돈이 필요하면 일해야지라는 관점에서 갈등을 조정해주지 않으면 이직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분들이 입사를 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경쟁에 대한 압박감이겠네요? 그런 점 때문에 멘토님께서 곤란하셨던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노동시간이 굉장히 길고, 다른 동료들이 잔업 하면 덩달아해야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잖아요. 처음에 사장님은 고생해서 들어왔다고, 쉴 때는 쉬고 열심히 일할 때는 일하라고 얘기하시죠. 그런데 자기 라인에 사람이 쉬면 다른 사람이 힘드니까 부장이나 실무진은 그렇지 않잖아요. 처음에는 이런 부분이 적응이 안 되죠. 그럼 사장이 거짓말했다, 아니면 다른 동료 직원들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느끼는 거예요. 이게 처음 취업 지원 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었어요.
결국 서로가 이해를 못 한 상황이네요.
북한 이주민들에게 우리 사회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어요. 그리고 회사로 찾아가서 인사 담당자에게 북한 이주민의 이런 특성을 설명하면 '그럴 수 있겠다.' 이러면서 이해를 해요. 이런 설명이 없으면 '쟤는 북한에서 와서 왜 저래?'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여론에서도 안 좋아지기 때문에 이러한 활동이 전체적인 인식 문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겠습니다. 그동안 해오시던 사업에다가 회사 한 곳, 한 곳 찾아가야 하고요.
네, 많이 힘들었죠. 기관과 연계되어 있는 기업도 있지만 개인이 발굴하기도 하고요. 갈등이 생기면 주로 저희가 이렇게 생각하시라 알려드리지만 안 될 때는 저희가 또 찾아가죠. 사과할 때도 있고 중재하기도 하죠.
겪어보지 못한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도움을 받은 것이 있나요?
현장 업무를 많이 뒷받침해준 이론은 한국도시연구소의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만들어낸 자료였습니다. 그 자료를 보고 감동받았어요. 발로 다니면서 쓴 정확한 연구를 보고 많은 걸 느꼈어요.
도시연구소의 제안으로 쪽방상담소도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발로 뛴 근거 자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에도 이런 빈곤층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쪽방상담소가 세워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때 쪽방상담소에서 실무를 보고 계셔서 더 와 닿았겠어요.
그런 자료들을 보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서 전국에 8개 정도의 쪽방상담소를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협의체가 있어서 같이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개별 단체여서 직접 가보고 대구에 적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죠.
다른데 가셔서 직접 적용할만한 것들을 알아오시는 경우가 많은가요?
네, 실제로 외국에 나가서 직접 보고 배워오는 경우도 많은데요.
월급이 적으니까 7년 만근 시 2달간 안식휴가를 줍니다. 한 달은 유급휴가, 한 달은 무급휴가입니다. 저는 그 기간 동안 옛날 동독 자리에 좋은 기관이 있다고 해서 18일간 독일에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해외를 다녀오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느끼는 게 많아지는데요. 선진국의 시스템을 배워오기도 하고, 개발도상국으로부터는 이러면 안 되겠구나 혹은 이런 점은 적용해봐야겠다 하는 것을 배워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시스템을 수용하고 스킬이나 능력을 키워서 만족도를 높이려고 하죠. 새로운 영역을 개발하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는 기업보다는 훨씬 유리한 것 같습니다. 실패에 대한 위험이나 금전적 손해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보통 해외 연수를 기획하고 다녀오시나요?
금전적인 부분도 고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작년에 우리 스텝들 전체가 일본으로 다녀온 적이 있어요. 많은 걸 배워왔던 경험이었는데요. 일본 효고현의 사회복지 기관은 마치 우리나라 NGO 같은 활기찬 분위기였어요. 그들이 직접 만든 안이 일본 전국 안이 됐거든요. 그래서인지 자부심에 가득 차있었죠. 이렇게 사회복지 배낭여행을 다니다 보면 다른 국가의 사회복지를 배워갈 수 있어요.
직접 다니시다 보면 각 지역마다의 복지 특색을 아실 것 같은데요. 어떻게 다른가요?
크게 미국식 복지와 유럽식 복지로 나뉘는데요. 이 두 복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개인과 국가 중 누가 책임을 지느냐 에요. 미국은 개인의 책임에 두고 있고, 유럽은 국가에 책임을 두고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유럽은 세금이 굉장히 많죠. 대신 그만한 혜택을 받을 수 있고요.
실업급여를 예로 들면, 자기가 받던 급여를 1년간 그대로 받고 직업훈련을 다녀요. 우리나라는 7개월이 최장이잖아요. 이건 우선순위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세금을 내는 것에 비해 누리는 게 많지는 않아요.
△ 전국, 전세계에서 대구와 공감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한 흔적들
다른 국가에서 사회복지사 처우는 어떤가요?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의 난민 기관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LA코리아타운 사회복지기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대표가 연봉으로 얼마나 받을 것 같냐고 하더라고요. 미국이 많이 받는 편이라고 들어서 7천 만원, 8천 만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엄청 많다고 생각했는데 1억2천 만원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던진 말씀이 '왜 비영리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하는가, 정말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많은 일을 해서 많은 혜택을 준다면 월급도 많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에 임금 구조가 그렇게 높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일을 잘하던 미국인 후배가 둘째 아이를 낳고 돈을 벌어야겠다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 지원을 많이 해줘야 한다고 전달했고 지금에 이르렀고 지금은 좋은 친구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만큼 많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기관이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사회복지 기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중에 하나가 정부 지원금이나 기부금을 받아서 속인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연대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의 활동을 투명하게 다른 기관에 공개하는 것입니다. 같이 일하고 속일 수 없으니 신뢰가 쌓이는 거죠. 정부 지원금보다 후원금이 많으니까 후원자들께 부끄럽지 않기 위한 것도 있고요.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복지 공무원에 많이 도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똑똑한 친구들이 공공서비스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젊은이들이 사회복지 공무원에 도전하는 이유는 공무원이 되면 해고될 위험 없이 정년이 보장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진심으로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어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도 있겠지만, 한창 패기 넘치는 시절인 대학생이라면 빌 게이츠나 주크버그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기보다는 현장 경험을 많이 하면서 그 경험을 키워줄 수 있는 조직을 찾거나 본인이 조직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어 이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도 좋지만, 본인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현실적인 제한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직접 조직을 만들어보고 그 조직이 제도화되는 것까지의 꿈을 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정성을 찾아 사회복지 공무원을 하기보다는 본인의 꿈을 바탕으로 그런 도전을 해볼 수 있는 사회복지사들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국제 교류도 해가면서요.
그렇다면 멘토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싶으신가요?
예전에 한 시사잡지에서 당시 영국 NGO들의 1년 예산이 한국 정부의 예산보다 많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어요. 영국 대학원생들의 제1의 직장이 대기업이 아니라 NGO였거든요.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NGO로 갔죠. 반면, 한국의 똑똑한 친구들은 전부 대기업, 의료, 유학, 대학원으로 가잖아요. 그래서 제 꿈은 10~20년 뒤에 우리나라의 NGO도 미국의 NGO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그 발전에 기여하는 거예요. 멋진 아이디어와 역량으로 더욱더 성장시켜서 우리나라 젊은 인재들이 NGO기관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인식이 변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죠, 보통 사람들이나 정부에서는 ‘자원봉사를 하는 건데 무슨 월급을 이렇게 많이 줘?’ 라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회복지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회복지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갖고 있는 핵심적인 가치관이기도 한데요.
보통 사회복지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저는 제가 이미 복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퇴직금, 실업급여도 그중 하나죠.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계층을 도와주는 것을 복지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복지는 성장할 수 없어요. 사회 시스템이 나아질 수가 없는 거죠.
무상급식 논란도 그래요. 독일에 가면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 모두 밥을 줘요. 그 핵심은 아이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한창 예민하고 민감한 시기에 저 친구는 돈이 많아서 밥을 사 먹는데, 나는 얻어먹는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돼요.
이런 저를 보고 진보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지만, 유럽식 복지가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회복지는 내가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불쌍한 사람들만 누리는 것이 아닌, 나도 누리는 것, 내가 받는 혜택 그게 바로 복지라는 거죠.
Side Story 리포터 후기
콘텐츠마케팅팀 리포터 김정현
사회복지사
담당부서:인터뷰
취재:김정현
INTERVIEW
김정현
jhkim86@saramin.co.kr
EDITOR
김정현
jhkim86@sara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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